여름의 끝자락, 고즈넉한 정원이나 오래된 고택을 거닐다 보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꽃이 있습니다. 아침에 지나칠 땐 분명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는데, 해 질 녘 다시 그 앞을 지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얼굴을 붉힌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죠. 마치 다른 꽃이 피어난 것은 아닌가 하고 눈을 비비게 만드는 이 신비로운 꽃의 이름은 바로 ‘부용(芙蓉)’입니다.
어떻게 같은 자리에서, 바로 그 꽃이 하루 만에 이렇게 드라마틱한 변신을 할 수 있는 걸까요? 혹시라도 이 카멜레온 같은 꽃의 비밀을 찾아 헤매고 계셨다면, 당신은 마법이 아닌 아주 정직한 ‘과학’의 세계에 한 걸음 다가오신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모든 변화의 열쇠는 꽃잎 속에 숨겨진 특별한 색소와 하루 동안의 ‘온도 변화’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합작품입니다.
아침의 순백색, 그 시작
부용의 하루는 대부분 순백색 또는 아주 연한 분홍빛으로 시작됩니다. 이른 아침, 밤새 응축했던 에너지를 터뜨리며 활짝 피어나는 순간에는 아직 붉은빛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꽃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일단 활짝 피어나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든 힘을 ‘개화’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죠.
이때의 흰색 꽃잎은 마치 이제 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의 깨끗한 캔버스와 같습니다. 아직 어떤 색도 칠해지지 않은 가장 순수한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며, 하루 동안 펼쳐질 놀라운 색의 마법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햇살이 그리는 붉은 그림
해가 중천에 떠오르며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부용의 캔버스 위에도 서서히 변화가 찾아옵니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꽃잎 속 작은 공장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붉은색을 만드는 특별한 재료가 생성됩니다. 즉, ‘온도’와 ‘햇빛’이 바로 붉은색 물감을 만드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온도가 높아질수록 꽃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당분(포도당)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바로 이 당분이 특정 효소와 만나면서, 흰색 꽃잎을 붉게 물들이는 마법의 색소, ‘안토시아닌’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점심시간 무렵 부용이 연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붉은색의 마법, 안토시아닌의 역할
그렇다면 이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름은 조금 어렵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마운 성분입니다. 사과나 딸기, 포도의 붉은색, 그리고 가을날 단풍잎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주인공이 바로 이 안토시아닌입니다.
부용꽃 속에서 이 색소가 하는 역할은 단순히 예뻐 보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강렬한 오후의 자외선으로부터 연약한 꽃잎과 씨앗을 보호하는 ‘천연 선크림’과 같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기온이 가장 높은 시간에 붉은빛이 가장 진해지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꽃의 지혜로운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저녁의 만취한 모습, 취부용
해 질 녘이 되면 부용은 하루 중 가장 짙고 매혹적인 붉은빛을 띠게 됩니다. 아침의 청초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술에 취한 듯 깊은 홍조를 띤 모습으로 변해있죠. 이 때문에 부용은 ‘술 취한 부용’이라는 뜻의 ‘취부용(醉芙蓉)’이라는 아름다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하루 동안 꾸준히 만들어진 안토시아닌 색소가 꽃잎 전체에 가득 쌓였기 때문입니다. 하루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지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하루살이 꽃의 슬픈 운명
이토록 화려한 변신을 보여주는 부용은 안타깝게도 단 하루만 피고 지는 ‘하루살이 꽃’입니다. 아침에 피어나 저녁에 붉게 물든 뒤, 다음 날 아침이면 힘없이 시들어 떨어져 버리죠. 이 짧은 생애가 바로 색깔 변화의 비밀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안에 벌과 나비의 눈에 확실히 띄어 수분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부용에게, 색깔의 변화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나는 지금 막 피어난 신선한 꽃이야(흰색)’, ‘나는 지금 한창 무르익었어(분홍색)’, ‘나는 이제 곧 질 테니 다른 꽃으로 가렴(붉은색)’ 하고 알려주는 똑똑한 생존의 언어인 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정말 아침에 본 그 흰 꽃과 저녁의 붉은 꽃이 똑같은 한 송이인가요?
A.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자리의 똑같은 꽃 한 송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의 흐름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색을 바꾸는 것입니다. 옆에서 다른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아니니, 하루 동안 진득이 관찰해 보시면 그 신비로운 변화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Q. 날씨가 흐린 날에도 똑같이 색이 변하나요?
A.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부용의 색 변화는 햇빛의 양과 온도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고 서늘한 날에는 변화의 속도가 매우 느리거나, 붉은색이 옅게 나타나는 등 그 정도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맑고 더운 날일수록 더 빠르고 선명한 변신을 보여줍니다.
Q. 부용 말고 색이 변하는 꽃이 또 있나요?
A. 네,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색의 꽃이 함께 피는 것처럼 보이는 ‘란타나’나 토양의 성질에 따라 색이 바뀌는 ‘수국’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식물 세계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놀라운 비밀들이 많이 숨어있습니다.
초보 정원사를 위한 부용 키우기, 묘목 심기부터 월동까지 A to 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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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및 도움이 되는 자료
- 부용 - 위키백과
부용꽃은 아침엔 흰색, 정오엔 분홍색, 저녁엔 빨간색으로 변하며 온도에 따라 변화 속도가 달라집니다. -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는 부용화 - hoho60
부용은 기온과 화판 속 성분 변화로 하루에 세 번 색이 변하며, 처음엔 흰색, 점심에 분홍, 저녁에 진한 붉은색을 띕니다. - 부용화/부용화의 효능 - 네이버 블로그
꽃잎 색 변화는 온도와 화청소, 산성 물질 농도에 따른 안토시아닌 함량 변동 때문입니다. - ≪ 부용 무엇인가? ≫ - jdm0777
부용 꽃잎은 하얗게 피었다가 분홍, 빨강으로 변하며 주로 약재와 관상용으로 쓰입니다. - 하루에 세 번 꽃 색깔 변하는 부용 - 아틀라스뉴스
부용은 multabilis란 학명처럼 색상이 자주 변하며, 아침 흰색에서 저녁 붉은색으로 변화합니다.
